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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선족 할머니의 통한의 16년(퍼온글)

아침이슬처럼~~~ 2005. 10. 4. 18:22
2005년 10월 4일 (화) 16:01  미디어다음
한 조선족 할머니의 통한의 16년

고국에서 16년 이산의 세월, 조선족연합회 진복자 총무 인터뷰

미디어다음 / 심규진 기자


ⓒ미디어다음
가족의 얼굴을 본 지가 16년이다. 돈을 벌어 금의환향 하겠다는 꿈으로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50세 아주머니는 이제 66세의 노파가 됐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접은 지 5년째다. 고향으로 돌아갈 비행기표 한 장 살 돈도 없이, 그는 고국 땅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동향의 동포들을 돕고 있다.

조선족 연합회 진복자 총무. 한국 내 조선족들의 통한의 세월을 부여안고 법 개정 운동에 나선 주인공이다.

“저도 집에 가고 싶고 자식들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재입국을 하려면 브로커에게 1000만원을 내야 합니다. 그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일했습니다. 16년 동안 가족들을 보지도, 고향 땅을 밟지도 못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조선족 동포에 대한 어떤 정책도, 법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조선족 동포들은 150년 만에 찾은 고국에서 단지 불법 체류자일 뿐입니다.”
1989년 해외 여행 자율화 조치로 중국과 한국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진 할머니는 고국 땅을 밟게 됐다. 공무원이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몸져 눕고 그가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대한민국은‘기회의 땅’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브로커에게 당시로서는 꽤 거금인 500만원을 준 대가로 그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친지를 만들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을 파는 보따리 장사로 나섰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뒀다. 대신 중국에서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중국어 개인 교습에 나섰다. 조선족은 정식 취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몰래 과외’에 나선 것이다.

진 할머니는 중국어 과외를 하며 10년 동안 중국에 있는 남편의 병원비와 아이들 교육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진씨의 희생 덕분에 진씨 가족들은 북경에 조그만 집 한 채도 마련했다. 그러나 진씨는 자신이 그토록 희생해 키운 자녀들도, 병구완에 나섰던 남편의 얼굴도 16년 동안 보지 못했다.

일단 중국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 재입국할 길이 사실상 막혀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 조선족의 역사와 희생에 대해서는 관심 없어"
"조선족들, 고국의 문화 언어 지켰다"



ⓒ미디어다음
이런 진 할머니에게 대한민국은 코리안드림을 이뤄준 고국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산 16년 이산의 한이 가슴깊이 사무쳤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처음부터 조선족들을 동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게 할머니의 주장이다. 처음 조선족들이 한국땅을 밟았을 때 한국정부는 "재외동포는 48년 이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노골적으로 조선족들을 동포에서 배제시킨 것이었다.

후에 조선족들은 동포로 인정됐지만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재미동포와 재일동포들은 취업과 부동산 거래, 경제 활동 등에서 혜택을 누리는 반면 조선족들은 언제나 불법 체류자로 낮은 임금과 임금 체불, 취업 사기 등의 희생자가 될 뿐이었다.

정부는 '조선족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경우 수십만이 넘는 조선족들이 모두 한국으로 몰려들어 인력 시장의 혼란이 우려되고 자국민들의 반감과 저항이 커진다'는 이유로 조선족들의 왕래와 취업을 제한했다.

해방이 된 후 재외동포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이고 이주정착을 도왔던 일본 등 다른 나라와는 너무도 다른 태도였다. "한국 정부의 조선족에 대한 시각은 그저 ‘돈없고 미천한 국제 미아’일 뿐"이었다고 진 할머니는 말한다.

이처럼 같은 민족에게서 받는 차별은 진 할머니를 급기야 ‘투사’로 만들었다. 할머니는 정부의 조선족 관련 정책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생업마저 중단했다.

지난 2000년부터 그는 조선족연합회의 총무직을 밭아 사회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가족들에게 보내는 생활비도, 자신의 체재비와 돌아갈 항공료 마련도 모두 포기한 채 내린 결론이었다.

조선족이 입국할 때마다 1000만원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불법 브로커 관행, 입국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느라 진 빚 때문에 5년 이상 한국에 머물며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조선족의 현실,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현지 영사의 비리를 그저 남의 일인 양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3D 업종에 종사하며 알코올 중독과 노숙, 질병과 임금체불 등으로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교육과 상담 활동을 벌이고, 재외동포법 개정을 위해 관련 시민단체와 정당, 관계 기관 방문을 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정신이 전혀 없는 정부입니다. 조선족들이 어떻게 해서 만주로 간 것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정부는 조선족들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고향에 와 불법 체류나 하는 쓰레기들로 취급합니다.

조선족들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한일합방 후 한국 사람들이 일본 체제에 순응할 때 동포들은 이국 땅에서 독립 운동을 했습니다. 그 땅을 지키고 우리의 전통 문화와 언어를 지켰습니다. 윤동주 선생의 묘비가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만주에 있지요.

북한 사회는 조선족 동포들을 한 민족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사회 체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입국할 때마다 불법적으로 돈을 쓰게 하고, 자유 왕래도 제한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조선족 동포가 한국사람과 결혼해서 한국에 들어오면 중국에 있는 자식들에 대한 포기 각서 까지 받았던 정부입니다.”

"150년 조선족 역사 가운데 한국행이 가장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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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 또한 브로커에게 내야 하는 1000 만원의 돈 때문에 16년 내내 한국에서 홀로 돈을 벌었던 진 할머니는 자신도 아이들이 보고 싶고, 고향에 가고 싶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진 할머니는 조선족들의 자유왕래를 제한해 브로커를 통한 비리를 양산하고, 장기간 이산가족을 만들어 조선족 가정을 파괴시키는 한국 정부가 ‘가정 파괴 정부’와 다를게 무엇이냐며 반문한다.

“조선족이 숱한 역경의 역사를 겪어 왔지만 한국행이 가장 최악입니다. 한국 정부는 ‘너희들 돈 벌려고 한국에 들어온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데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합니다. 브로커에게 줄 돈을 사채를 빌려 내기 때문에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듭니다. 그 돈을 갚기 위해서는 최소한 5-6년을 한국에서 일 해야 합니다. 그 사이 조선족 가정은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이주와 소수민족 탄압으로 얼룩진 조선족의 150년 역사이지만 이렇게 가정까지 파탄난 경우는 한국행이 처음입니다. ”
진 할머니가 한국 정부에게 시급히 바라는 정책은 조선족들의 국적 회복이 아니다. 그저 자유롭게 왕래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미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자유 왕래가 허용돼 한국에서 3-4 개월 일한 돈으로 러시아 현지의 1년치 생활비를 벌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한국에 들어오곤 한다.

마찬가지로 조선족들도 자유왕래를 하게 해 주면 장기 불법 체류나 불법 브로커 등의 부작용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장기간 한국에 머물 필요가 없어지면 가정이 파괴될 일도 없다.

'조선족들은 고국에 오지 말라. 정 들어오겠다면 브로커를 통해 돈을 쓰고 오라'는 한국 정부의 태도에 환멸을 느낀다는 진 할머니는 “조선족이 불법이라면 애초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국가 기관이 오히려 불법을 방조하고 그에 편승해 불법적인 이익을 취하고 있는 게 현실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족 사람들은 한국에서 계속 눌러 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유 왕래를 하게 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브로커들한테 돈을 날리고 그 돈을 갚기 위해 5년 넘게 고생하며 조선족 가정이, 나아가 사회 전체가 붕괴되는 악순환을 막을 수 있어요.”
현재 재외 동포법은 조선족들을 동포로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정책은 개선된 것이 전혀 없다. 취업이나 왕래 등도 여전히 제한돼 있다.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모든 것이 가짜입니다. 결혼도 가짜, 친지도 가짜, 심지어는 민족을 바꿔서 한족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조선족이라고 하면 오히려 불법 체류자로 몰리고, 불이익을 당하니까요. 전세계적으로 자기 민족을 차별하고 내쫓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진 할머니는 “민족적 권리는 천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머나먼 타국에서 조국을 꿈에 그리던 조선족들은 '천대받는 제 2의 민족'으로 오히려 조국에 대한 증오의 한을 품고 돌아간다.

진 할머니는 한 민족이 동포에게 강제하는 영어(囹圄)의 시간들은 이제 자신의 세대에서 마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족 동포들의 삶은 천박한 경제 논리가 민족 정신을 마비시켜버린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이 땅에서 할머니의 16년 한이 풀릴 날은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