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 지역..일가족
중 4명이 지뢰 피해 당한 경우도 피해자들 보상절차는 미미…관련 단체 "피해보상 특별법 마련돼야"
미디어다음 / 양구=오미정
기자
박춘영 할머니가 어렵사리 보여준 지뢰의 상처에는 사고 후 30년지 지난 지금도 고름이 배어 나왔다. ⓒ미디어다음
오미정
박춘영 할머니(80)는 그날을 생각하기도 싫다고 했다.
지뢰 피해자를 만나러 왔다는 기자에게 “이런 거 해 봐야
뭐하냐”며 손사래만 쳤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까지 4시간이나 차를 몰고 왔다고 통사정한 끝에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 할머니는 1960년대 중반 쯤, 서른여덟 살 되던 해 5월에 고사리를 뜯으러 산에 갔다가 지뢰를 밟고 발목 아래를
잃었다.
“발을 헛딛고 길옆으로 떨어졌는데 ‘꽝’하는 소리가 나더니 나가 자빠진 거야. 혼자 엎어져 울다가 ‘죽어도 사람들
보이는데서 죽어야겠다’고 골짜기에서 마을 신작로로 기어 나왔어. 좀 있다 군인차가 곁에 와 서더니 부대로 데려가서 응급치료를 해 주고는 딴 집
마당에 내려주고 갔어. 춘천 도립병원에서 한 달 열이틀을 입원해서 다 헤진 다리 잘라내고 집에 온 다음엔 군인차 얻어 타고 인제 보건소 다녔어.
먹을 게 없어서 이 다리를 하고 또 산에 고사리 하러 다녔지.”
지금도 생계를 위해 마을 한 편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할머니는
지뢰로 끊어져버린 발목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의족을 끼고 뺄 때마다 진물이 나서 벗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얘기를 이어나가던
할머니는 의족을 빼내더니 내복과 거즈로 2~3겹을 감싼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놨다. 발갛게 부어오른 상처에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고름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지뢰는 할머니만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1995년 음력설에는 큰아들 오종식 씨(당시 나이 40세)와 손자 은철
군(당시 나이 12세)이 지뢰 폭발로 숨졌다. 눈밭에서 토끼를 잡으러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이들의 시신은 나흘을 수색한 끝에 인근 산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다. 큰 아들이 죽기 전인 1993년에는 둘째아들 오흥식 씨(사망한 은철 군 아버지. 당시나이
37세)가 산에 먹을 것을 하러 갔다가 지뢰를 밟고 엄지발가락을 잃었다.
가족 중 4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보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군사지역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빨갱이’ 취급당할까 무서워 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마을 인근 지역이 지뢰밭인 것을 알았지만 할머니는
“산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힘든 형편에 지천에 널린 산나물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지뢰
때문에 망하다시피 했어.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이 나라가 원망스러워. 다리가 없는데 장애도 4급 밖에 안 줘서 혜택도 없어.”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착…마을 주민 55명 지뢰 피해 2002년에는 대전차지뢰 터져 트랙터 몰고가던 주민
실명
이 마을에서는 대인지뢰 뿐 아니라 대전차지뢰 폭발 사고도 일어났다. 마을 주민 유지택 씨가 2002년 당시
대전차지뢰가 터져 움푹 패인 마을 인근 야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미디어다음 오미정
박
할머니가 사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오유리는 침식분지 지형인 일명 ‘펀치볼(Punch Bowl)’ 지역이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간
격전이 펼쳐졌던 전장이었지만 지금은 을지전망대, 전쟁기념관, 제4땅굴, 통일관 등 수많은 안보전적관광지에서 얻는 수입과 고랭지 청정농업 등으로
부농의 꿈이 영글고 있는 곳이다.
또 주변 산에서 얻는 산나물과 약초, 가시오갈피 등 약용식물도 많아 주민 살림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더구나 대규모 통일농장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남북농업교류의 중심지로도 부상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 땅이 이렇게 변모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전후 정부는 이 땅을 국유농지화 해 인근 지역 주민에게 경작권을 주고 이주시켰다. 이 마을 주민 류지택 할아버지는 “원래
북한 땅이던 것을 6.25 때 수복했다고 들었다”며 “한국전 당시 전투가 격렬했던 지역이라 땅 주인이 북으로 갔거나 죽어서 빈 땅이 된
곳”이라고 설명했다.
인근 지역에 살던 가난한 농민들은 지뢰밭 한가운데이지만 ‘경작지’를 준다는 말에 솔깃해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이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박 할머니 역시 “남편은 죽었는데
애들은 여섯이나 되고,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땅은 없고…. 전쟁 끝나고 나라에서 여기 땅을 그냥 부쳐 먹게 해 준다고 해서 인제에 살다가
들어왔다”고 했다.
이 마을에 사는 주민 1700명 가운데 55명이 지뢰 폭발 사고를 당했다. 2002년 6월에는 마을 인근
야산에서 대전차 지뢰가 터졌다. 평소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길이라 방심했던 한 주민이 트랙터를 몰고 갔다가 지뢰가 터진 것이다. 이 주민은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갈빗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사고가 났던 장소에는 아직도 움푹 팬 지뢰 폭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뢰로 다친
민간인 2000명 선.. 피해자 상당수 보상 못받아 시민단체 등 "피해자보상법 마련되야"..현재 의원입법 준비
중
오유리 마을 여기저기에는 지뢰지역을 표시하는 표시판과 철조망이 남아있다. ⓒ미디어다음 오미정
민통선 지역 뿐 아니라 군사시설 여기저기가 ‘지뢰밭’이다보니 지금까지 민간인과 군의 피해도 적지
않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은 한국전쟁 이후 지뢰로 인한 민간인 피해 규모는 2000여 명 이상 되며, 군인 피해자는 이에 두 배인
40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원도 양구 뿐 아니라 경기도 연천군 대광리에서도 50여명 이상의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지역에서는 지금도 매년 2~3건의 크고 작은 지뢰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지뢰는
발목지뢰로 알려진 M14. 한번 묻어 놓으면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일명 ‘멍청이’ 지뢰로 밟을 경우 발목 아래를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M14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지뢰탐지기에도 잘 발견되지 않는데다 지름 5.5cm, 무게 94g로 크기 또한 작아 빗물 등에 쉽게
유실된다.
이들 지뢰 피해자에 대한 보상 규정은 아직 법제화되지 않고 있다. 국가배상법에 의해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는 방법 밖에는 없는데 이 경우 재판 과정에서 1~2년은 족히 소요된다.
그나마 이 법이 제정된 67년 이전의
피해자는 국가배상법으로도 보상을 받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또 국가배상법의 시효가 3년에 불과해 과거에 사고를 당한 피해자 역시 보상 받기
힘들다. 박 할머니 역시 배상청구 시기를 놓쳐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경우다. 박 할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우리는 당시에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방법도 몰랐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2003년 이들에 대한 국가의
피해 보상을 제도화하는 ‘대인지뢰의 제고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에 의해 한차례 발의됐다. 하지만 이 법은 본회의에
상정되지는 못하고 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지난해 5월 29일 자동 폐기됐다. 법안 내용 중 ‘대인지뢰 제거’ 부분에 정부가 난색을 표하면서
법안 처리가 늦어졌던 탓이다.
현재 김성곤 열린우리당 의원이 ‘지뢰 제거’ 항목 없이 ‘피해 보상’ 부분만 분리해 법률 정비를 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이 역시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구체적 자료들이 미비해 답보상태다.
강원도 양구의 최형지 도의회의원은 “생계를
위해 민통선에서 나물과 약초를 캐다가 지뢰 피해를 입은 강원도 주민들이 보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용공 세력으로 몰려 조사를 당했다”며 “이들에
대한 보상은 물론 명예회복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 문은영 사무국장도 “배상 책임을 덜기 위해
군이 피해를 입은 민간인이 군사지역에 무단으로 출입했다고 왜곡해 발표하는 사례도 있다”며 “피해자들이 국가배상법이 아닌 피해자 보상 법률로
보상을 받아야 공정한 배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