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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론가들이 바라보는 브로크백 마운틴(1)

아침이슬처럼~~~ 2006. 3. 11. 10:22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담아내는 아름다운 경관은 일종의 숭고한 이미지 그 자체다. 그것은 영화 내적으로 감지되는 미국 20세기 역사의 다시 쓰기, 그리고 웨스턴 장르와 멜로드라마 장르의 다시 쓰기 욕망을 때로는 억압하고 때로는 아름답게 포장해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만은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어디에 기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기껏해야 이 영화는 ‘미국의 멋진 경관(landscape)을 모아놓은 이미지 덩어리’보다 못하다고 대답한다. 물론 이는 대중적 열광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제동을 제 의무로 삼는 진보 취향의 강박적인 삐딱선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호버만의 독설에서 한 가지 분명한 건 정말 브로크백 마운틴의 경관이 숨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점이다. 산등성을 따라가는 양떼의 모습, 그 뒤로 펼쳐진 능선과 하늘, 외롭게 달리는 차의 전조등이 비추는 어둑한 저녁의 광활한 벌판.

마치 그림 엽서 같아서 권태롭기까지 한 이 경관들은 ‘훼손되지 않은 것’이 주는 숨막힐 정도의 숭고함을 가지고 있다. 그 숭고함은 영화 속의 그 어떤 순간도 제공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닌다. 그것은 더러운 옷을 홀딱 벗은 채 손에 물을 묻혀 아랫도리를 닦는 에니스의 모습과, 이에 아랑곳없이 감자 깎는 데 열중하는 잭의 시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프레임에 담겨진 샷을 바라보는 우리의 불편함을 넘어서는 숭고함이다. 그것은 텐트 안에서 벌어진 땀내 나는 게이 섹스조차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기념화하는 숭고함이다. 그 숭고함은 두 남자의 사랑을 일반적(universal) 진리로 승화시켜 관객과 평단 모두를 감동하게 만드는 이안의 그 웅장한 우주적(universal) 서사를 초과한다.

이 고전적인 숭고함의 이미지는 사실 <브로크백 마운틴>이 가진 역사주의의 중앙에서 묵직한 힘을 가진다.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자. 물론 그 역사주의의 표면에서 감지되는 것은 메타 장르적 기술법이다. 미국 관객이 아니더라도 감지할 수 있는 광활한 서부극의 무대, 그리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능가하는 절절한 멜로드라마의 이야기 틀은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게이 로맨스 안에서 만난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었던 이 두 장르는 만나자마자 서로에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흠집과 균열의 순간들은 서부극과 멜로드라마라는 두 장르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동학을 전경화한다. 두 장르를 이어주는 가녀린 끈이자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가족’이라는 테크닉은 이제 더 이상 미국적 국수주의나 제국주의, 혹은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파수꾼이라는 역할을 수행해내지 못하고 처참하게 부서진 채 에니스와 잭의 퀴어 로맨스 안으로 전유된다. 어느 평자가 꼼꼼하게 지적했듯이 이 영화는 로맨스와 서부극이라는 두 장르의 낡은 의미들과 멀찍이 떨어짐으로써 영화적 기적을 이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브로크백 마운틴>은 “낡은 의미의 장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순간을 통해 좀 더 깊이 있는 장르의 미학적 생명력이 의식되고 자의식적으로 되는” 영화인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메타 장르적 기술법은 (미국) 20세기의 낡은 역사를 다시 쓰고자하는 어떤 프로젝트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르적 실천은 단지 감독 개인의 미학적 의지라기보다는 오늘날 문화 생산 상황 속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한계의 결과다. 이러한 관점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에 반성적 역사기술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며 열광하는 태도는 일견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곤혹스러움은 바로 이 ‘다시 쓰기’의 기운이 감지되는 순간에 등장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문화적 소비 상황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정전들 사이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장르의 낡은 의미들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비로소 그 생명력이 의식되는 결과를 낳자마자 또 다시 그 다시 쓰기의 의미를 재빨리 고전화하기 때문이다(사실 이러한 예로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이 영화의 다시 쓰기에 열광하면서 이 영화를 다시 고전화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작가주의나 정전주의적 평론의 기조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이미지-경제를 움직이는 메커니즘들, (종종 경박한 방식으로 탈역사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즉 대중문화의 전 지구적 회로와 그 안에서 접속하는 다양한 맥락들은 장르의 낡은 의미뿐 아니라 그 의미들의 새로운 쓰기마저도 특정한 정치적, 역사적 의제 안에서 읽어내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의 메타 장르적 기술과, 그것이 시도하는 다시 쓰기의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작동할 수 있게끔 움직이고 있는 내부의 역사주의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바로 여기서 경관들의 숭고함이 고개를 든다. 완벽하게 회화적인, 그리고 숨막힐 정도로 ‘훼손되지 않은’ 것의 숭고함. 마치 고전을 감상할 때 느끼는 희열과도 유사한 이 경관들의 숭고함은 영화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과거에 대한 절망적인 갈망과 연결된다. 이제는 낡은 장르의 의미처럼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되지도, 경험되지도 못할 어떤 과거. 황금을 캐내고, 영토를 넓히고, 가족을 만들어 사회를 구성하는, 그러나 이미 부서져버린 지 오래된 그 진리가 숭앙되었던 어떤 과거. 자기성의 보존을 위해 타자를 ‘타자로 만드는’ 억압적 질서가 유지되었던 어떤 과거. 그것은 더 이상 낡은 의미를 고집할 수 없는 지금 시대에 이 영화가 다시 소환하고자 하는 어떤 견고한 것으로서의 역사다. 그것은 영화 안에서 휴머니즘과 우주적 낭만이라는 우산 아래로 수렴되는 퀴어 섹슈얼리티와 그에 대한 동시대적 윤리를 대면하면서 안타깝게 난자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과거를 파괴하는 다시 쓰기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 과거를 소환하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한 <브로크백 마운틴>의 역사주의는 구역질과 졸도 직전의 에니스처럼 처절할 정도로 절망적이다. 시작부터 불가능했던 갈망이기 때문이다.

그건 또 다른 차원에서의 ‘억압된(아니, 억압되어야 할) 것의 귀환’을 꿈꾸는, 혹은 존 웨인이 존 슐레진저의 <미드나잇 카우보이>에서 ‘카우보이 남창’ 조 벅(Joe Buck)이나 마돈나의 '뮤직' 뮤직비디오에서 경쾌하게 춤추는 카우걸 댄서로 부활하는 악몽과도 같다. 바로 거기서 경관의 숭고함, 그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은 이 절망스러운 갈망의 끝을 향수와 애도라는 권태적 상태로 끌어들이는 가장 위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 완벽한 회화성이 제공하는 시각적 권태는 포스트주의적 ‘다시 쓰기’를 통해 작살나기 일쑤인 그 견고한 과거에 대한 역사적 권태로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미 사망도장이 찍혀진 채 도착한 엽서를 들고 똥싼 개 마냥 어찌할 줄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은 기이한 영화다.


박진형(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