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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길 / 윤동주

아침이슬처럼~~~ 2006. 9. 26. 21:59
 


자두나무 당신   김 언 
당신과 내가 간편한 사이라서 
헤어져도 좋은 간편한 사이라서 
당신의 수첩에서 간편한 내 이름을 지우고 
냉큼냉큼 잘도 받아먹은 씨앗들 
당신의 씨앗들 모두 뱉아서 
간편한 목소리로 
너무 간편한 목소리로 내가 
잘가, 하고 부르면 
당신은 뒤도 안 돌아보고 
딱 한번 돌아보고 
가서는 아니 오고 
영영 아니 오는 당신에게 
간편한 당신에게 
간편한 목소리로 
너무 간편한 목소리로 내가 
자두, 하고 부르면 
당신은 자두나무가 되어 
불알 주렁주렁 달린 자두나무가 되어 
우리 사이에 너무 간편해서 좋은 우리 사이에 
씨알 굵은 당신의 목소리를 토해서 
게워내서 
더러워 더러워 
내가 다시 자두, 하고 부르면 
당신은 내가 아니라서 
간편한 내가 아니라서 불편한 당신은 
안개 자욱한 자두나무 숲이 되어 
운다네 자두나무 자두나무 
당신의 온 숲을 흔들어 운다네 

인생  이선영 
내 인생이 남들과 같지 않다고 생각됐던 때의, 
외딴길로 밀려나 있다는 
낭패감 
그러나 내 인생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이윽고 그 남다르지 않은 인생들이 
남다르지 않게 어우러져가는 큰길에 
줄지어 서서 
이 늘비함을 따라 가야 할 뿐 
슬며시 도망나갈 외딴길이 없다는 낭패감 

흐르는 것은  조병화 
흐르는 것은 
한번 자리를 뜨면 
뜬 그 자리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려니 
구름처럼, 
바람처럼, 
물 처럼, 
세월처럼, 
인생도 세월따라 흐르는 것이어서 
그 자리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것이어라 
아, 그와 같이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이 이별이어라.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뭉게구름  최승호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토란잎  안도현 
빗방울, 
토란잎의 귀고리 
이것저것 자꾸 
큰 것도 작은 것도 달아보지만 
혼자 다 갖지는 않는 
참으로 단순하게, 
단순하게 사는 토란잎 
빗소리만큼만 살고 
빗소리만큼만 사랑하는 게다 
사랑하기 때문에 끝내 
차지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거다 
귀고리, 
없으면 그냥 산다는 
토란잎 

가을, 그리고 겨울   최하림 
길은 
가을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길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좋은 풍경  정현종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진흙 눈동자  나희덕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신다 
아버지, 부르면 
그제서야 너 왔냐, 웃으신다 
갑자기 식어버린, 
열려 있지만 더 이상 피가 돌지 않는 
저 눈동자 속에 
어느 손이 진흙을 메워버렸나 
괜찮다, 한 눈은 아직 성하니 
세상을 반쯤만 보고 살라는 모양이다 
조금씩 흙에 가까워지는 게지,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고요한 진흙 눈동자 
그 속에 앞산의 나무 몇 그루 들어와 있다 



 The Secret Garden     Chava Alberstein
		
		
			
	
	
출처 : ♥꼬모의 오두막♥
글쓴이 : 꼬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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