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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의 작품들

아침이슬처럼~~~ 2017. 8. 29. 11:40

2012.07.0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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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은 금발소녀의 로맨스나 러브 스토리가 주를 이루던 ‘80년대 소녀 만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자유’와 ‘인간애’를 그린 소녀 만화계의 이단아이자 혁명가이다. 가상의 제국 보드니아 혁명을 다룬 ‘북해의 별’을 시발로, 한국적인 필체와 정취로 여성 무협만화의 세계를 제시한 ‘비천무’, 북만주를 무대로 한 여야장과 무사의 사랑을 그린 ‘불의 검’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언제나 만화를 넘어선 만화 그 이상의 세계를 그려냈다. 또한 그녀는 한치의 허술함도 용납치 않는 내러티브와 연출, 톤의 사용을 억제한 손그림만으로 만들어낸 화면효과 등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치밀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독자와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작품, 더해가는 나이와 더불어 새롭게 읽히는 작품, 그녀의 작품세계는 그러하다. 서사만화가 무엇인지,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하며, 여성작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 굵은 필체와 주제의식으로 그녀는 가히 당대 최고의 작품만을 발표해왔다.


‘80년대이기에 가능했을, 시대가 낳은 주제들을 그토록 장엄한 필체로 그려낼 작가가 김혜린 외 또 누가 있을까. 그녀는 비극과 장려(壯麗), 남루와 영광이 공존했던 ‘80년대가 낳은 최고의 여성 작가이다.

 

<1983년 도서출판 프린스 + 창만사 ‘북해의 별’ 초판 + 재판>

<2005년 길찾기 ‘북해의 별’ 애장판>

 

이 작품은 가상의 국가 ‘보드니아’를 배경으로, 자유와 혁명에 대한 작가의 젊은 날 열정과 단상이 담긴 장편 데뷔작이다. ‘87년 6월 항쟁의 열기에 고무된 시대적 정황과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군부정권에 대한 반감들이 유리핀 멤피스라는 군인 정치가를 통해 이상적인 형태의 혁명과 진정한 군인의 역할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는 정치가의 몫이며, 정(政)은 정(正)이어야 한다’는 유리핀 멤피스의 소신은 곧 그녀의 신념이기도 할 것이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아낌없이 죽어가는 젊은 혁명가의 초상은 처연한 빛을 발하며, 자신과 어미를 버린 아비에 대한 복수로 일생을 마감하는 비요른 누벨 파르티프라는 비운의 인물을 둘러싼 가족사 역시 비장한 감회에 젖게 한다. 양지의 주인공이 유리핀 멤피스라면 비요른 누벨 파르티프는 음지의 주인공으로 작품의 전반에 걸쳐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케다 리요코의 영향을 받은 초기 그림들은 한눈에 봐도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서너 권이 지나며 눈에 띄게 안정된 그림체로 향상되며, 중반 이후엔 작가 특유의 빈틈없고 날카로운 그림체로 변모된다.

정도만을 고집하는 유리핀 멤피스는 현재의 시각으로 보기엔 치기어린 소영웅의 모습으로도 비치지만, 그것은 지난 시대의 그림자가 투영된 작가의 젊은 치기 탓이려니 생각한다. 이후 김혜린은 프랑스 혁명정신을 주제로 한 ‘테르미도르’와 동양으로 시선을 돌린 ‘비천무’와 ‘불의 검’과 같은 작품을 통해 ‘자유’와 ‘인간애’ 를 주제로 한 작품세계를 전개한다.

 

<1992년 도서출판 서화 ‘테르미도르’ 초판 >

<2005년 길찾기 ‘테르미도르’ 애장판>

 

이 작품은 김혜린의 작품 중 가장 난독을 요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북해의 별’ 이후 프랑스 혁명정신(자유, 평등, 박애)을 주제로 다룬 이 작품은 그간 작가가 천착해온 ‘자유’라는 주제를 가장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만 진중한 무게에 눌려 읽는 재미는 반감된다.


프랑스 혁명이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파리 코뮌이 붕괴되기까지 5년에 걸친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 기간을 무대로, 귀족의 딸이었던 알뤼느와 사생아로 태어나 혁명의 불길속에 죽어간 유제니의 짧은 로맨스가 다뤄지고 있다. 이들의 로맨스엔 어린시절부터 알뤼느를 좋아했던 줄르가 삼각축으로 등장해 관찰자적 입장으로 혁명속에 울고 웃는 인간 군상들을 지켜보며 혁명정신을 되짚는다.

 

아무런 인과관계 없던 이들이 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처음엔 혁명의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서로의 생존을 위한 이해관계 속에 혁명의 이념은 변질되고 반동이 일어나게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모든 활동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투쟁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고, 역으로 자유와 평등이 얼마나 병립하기 어려운 이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개개의 인물들은 그 시대를 살아낸 혁명의 자식들로 그들의 삶을 통해 그 같은 사실을 작가를 대신해 대변하고 있다.

 

<1988년 창만사 ‘겨울새 깃털 하나’ 초판 / 1998년 대원문화출판사 '겨울새 깃털 하나' 재판>

 

‘80년대 중반 사회변혁의 움직임속에 태어난 이 작품은 한 소설가의 내적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단편 ‘그대를 위한 방문자’의 연작으로 주인공 지한의 내면의 싸움을 지켜보는 문화부 기자 박신애의 단상들이 소설가의 내면을 읽는 나레이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나친 감정과잉과 자기미화적인 내레이션 등이 촌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당대의 사회움직임과 예술가적 고뇌의 단상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이 작품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시로 노래했던 김수영, 김춘수, 강은교와 같은 시인들이 언급되며, 지한의 외모는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했던 이제하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냈다.

 

<1986년 도서출판 프린스 ‘비천무’ 초판 / 애장판 발간시 한정 첨부된 금장 책갈피>

<2005년 대원씨아이 ‘비천무’ 애장판>

 

(元) 말, 명(明)의 태동 직전 난세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반몽흥한을 꿈꾸다 멸문지화를 당한 절강성 호북유가의 혈손 진하가 몽골 대표두의 서녀인 설리를 만나 만들어가는 지난한 삶과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남송의 멸망 이후 원의 지배하에 있던 한족들이 반란을 꿈꾸고, 그 핵심이었던 호북유가 유장옥은 동지의 배신으로 멸문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진하는 문인 악객이던 곽정에 의해 유가의 가보인 ‘비천 십이신기’와 함께 살아남아 하북성 일대를 떠돈다. 작은 마을 산매에서 만난 몽골 대표두의 서녀 설리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평생의 낙인을 찍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삼대 거두중 진우량의 자객이 되어 ‘철기십조’의 총관이 되기도 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은원의 관계속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남을 거듭하며 끝내 함께 살 수 없었던 세월을 죽음으로써 마무리한다. 두 사람의 관계속에 얽히고 설킨 남궁준광, 진여진, 야훌라이, 아신과 같은 인물들은 아득한 슬픔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진다. 김혜린은 이들 외에도 무명초처럼 살다간 수많은 인생들에 대해 설리가 추는 비천무를 통해 진혼하며 작품을 마무리한다.

 

이재학의 무협만화를 모티프로 한 듯한 검술장면들이 기존의 여성만화에선 볼 수 없던 장쾌한 화면구성을 보여 주며, 명태조인 주원장이 진우량을 맞아 대파하는 ‘파양대전’은 삼국지의 ‘적벽대전’에 버금가는 스펙터클한 화면구성으로 긴박감과 리얼리티를 살리고 있다.

 

<1992년 도서출판 육영재단  '불의 검' 초판/ 1995년 대원문화출판사 '불의 검'>

<2005년 대원씨아이 ‘불의 검’ 애장판>

 

청동기말기, 철기시대의 도래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가상의 북만주 일대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철기부족 카르마키에게 나라를 빼앗긴 아무르족이 카르마키로부터 수도 치치누르를 회복하는 과정을 웅혼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무르의 가라한 아사와 이름없는 전사의 딸 아라가 만나 애닯은 사랑을 이어가고, 천궁 마리한과 신녀 소서노를 둘러싼 세 사람의 우정과 애증의 편린들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이들을 이간질 시키려던 중원의 모사가 제백의 눈과 입을 통해 그려지는 세 사람의 관계는 유혹과 흔들림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아무르를 떠받치는 든든한 동량이 된다.

 

이들 외에도 혈족에 의해 여성으로써의 삶을 망가뜨린 채, 남성에 대한 증오심으로 여성천하의 세상을 꿈꾸다 죽는 카르마키의 여왕 카라와 버려진 삶 속에서도 가라한과 아라를 만나 인생을 축복하며 노래하다 죽는 바리의 삶이 진한 감동속에 그려진다.


작가 김혜린이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아 부어 10년에 걸쳐 완성한 이 작품은 천박한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유장한 이야기의 흐름에 묻어나는 진한 감동으로 몸과 마음을 젖게 한다.

 

가라한 아사가 전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오스트로프스키의 자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주인공 빠벨 꼬르차킨(파웰 코르차킨)이 범부에서 혁명의 전사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는 듯한 벅찬 감동의 순간을 느끼게 만든다.

 

<1998년 도서출판 대원 ‘아라크노아’ 미완>

 

화성 연수를 떠난 경찰 간부후보생 지나는 화성에 도착하자 마자 게릴라의 습격을 받고,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과 동료들이 특수수사국의 실탄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실망한 지나는 경찰직을 사퇴한 뒤 자신을 구해준 앤디(안드로이드) 사이퍼 집단인 아라크노아에 입단해 케이, 크리슈나와 더불어 정의를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거대한 악의 축 유니버셜 신디케이트의 총수 캐시어스는 이들에게 전면전을 선언하며 이들의 긴 싸움을 예고한 채 이야기는 중단된다.


김혜린이 그린 드문 SF물로 무대를 미래의 우주로 바꾼 선과 악의 해묵은 싸움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다. 싸움의 주체들은 끊임없이 전쟁의 목적과 의미를 되묻고, 안드로이드 사이퍼로 태어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갈 길이 먼 장편작이 될 수도 있었을 이 작품은 끝내 완결을 보지 못한 채 미완으로 남았다.

 

<1998년 도서출판 대원 ‘광야’ 미완>

 

일제 식민지를 배경으로 남해의 어촌마을 개포리에서 자란 두 친구 재우와 윤석, 황해 갑부의 아들 이강 등 격랑의 시대를 살아가는 식민지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든 것이 척박한 시대를 배경으로 이들이 펼쳐갈 이야기는 암담하기만 한데, 이야기는 서두만 알린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품고 있는 무게는 상당해서 완결이 되었다면 만화사에 길이 남을  대작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작가의 개인사정인지 출판계의 사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불행히도 이 작품은 중단된 채 소생할 기미가 없다. 미구에 작가가 작품을 완성해 준다면 그보다 큰 기쁨이 없겠지만, 너무 변해버린 시대가 더이상 이 작품이 완성될 가능성을 없게 한다. 체르니셰프스키, 마야코프스키, 예프투센코, 고리키, 푸쉬킨 등 소비에트 리얼리즘 문호들의 이름과 작품이 떠오르는 기묘한 흥분을 안기는 미완의 대작이다.

 

<1998년 도서출판 대원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 / 1998년 도서출판 대원 ‘샤만의 바위’>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

타클라마칸과 누란유적에 얽힌 슬픈 사랑의 전설을 고고학과 학생 진우의 눈을 통해 그린 작품. 1500년의 시간을 타임슬립하며 연결되는 창부와 무명화가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탄탄한 연출로 빛을 발한다.

 

<샤만의 바위>

애꾸눈 떠돌이 라이가 우연히 당도한 샤만 쿤의 마을에서 목매 죽은 어머니처럼 폭력남편에게 학대받는 여인 리리를 만나 탈주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바이칼호수 인근의 무당바위를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신화와 토속신앙이 어울린 모호한 어떤 공간을 배경으로 비극적인 연인들의 사랑과 해피엔딩을 다루고 있다.

 

<2003년 길찾기 ‘노래하는 돌’>

 

작가의 데뷔 20년을 기념해 그간 발표된 단편들을 묶은 애장판으로 9편의 단편(붉은 돌의 왕자, 아만테스, 그대를 위한 방문자, 히스꽃 필 때에는, 우리들의 성모님, 로프누르, 샤만의 바위, 11월의 초상, XX)과 2편의 짧은 컬러 에스프리(노래하는 돌, 꽃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1986년, 1987년 '아홉번째 신화' 2호, 3호>

 

1985년 여성만화동호회 나인의 자비로 발간된 ‘아홉번째 신화’는 만화가 아홉번째 예술임을 천명하는 여성작가들의 도발적인 의지가 담긴 무크지였다. 

이 무크지엔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김진, 이정애, 이명신, 유승희 와 같은 당대 최고의 기라성 같은 여성작가들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김혜린은 세 번에 걸쳐 발행된 이 무크지에 ‘그대를 위한 방문자(85년)’ ‘히스꽃 필 때에는….(86년)’ ‘우리들의 성모님(87년)’을 발표했다.

 

 

<1988년 '르네상스' 창간호 / 1995년 '마인' 창간호>

 

르네상스 창간호에 '테르미도르' 연재 시작, 마인 창간호에 '샤만의 바위' 게재

 

<1995년 '이슈' 창간호 / 1997년 '아디' 창간호 / 1999년  '씨너클' 창간호>

 

이슈 창간호에 '아만테스', 아디 창간호에 '붉은 돌의 왕자', 씨너클 창간호에 'XX' 게재

 

 



 

<2017년 대원씨아이 인월’>


고려말기 우왕 5(1379), 내우외환과 남왜북로의 시대를 살아가는 부곡민의 자식 마동과 감동 형제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미완의 작품들은 그대로 남긴 채 새롭게 시작되는 작품인 만큼 또다시 연재 중단될까 우려스러운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수십 년 만에 새로이 만나게 되는 김혜린의 작품이기에 죽은 자식 살아 돌아온 듯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게다가 수십 년 만의 연재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뎃생으로 탁월한 화력(畵力)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야기는 서막만을 알렸을 뿐, 전체의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다. 부디 중단되는 일 없이 잘 마무리되어 작가를 기다리던 숱한 팬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