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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론가들이 바라보는 브로크백 마운틴(2)

아침이슬처럼~~~ 2006. 3. 11. 10:19

이안의 영화들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황량한 공간들은 정착하기를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실패하는 특수한 유목민적 공간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용인될 수 없는 사랑에 빠짐으로써 60년대 미국사회에서 일탈한 주인공들이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꿈꾸는, 그리고 실패하는 이야기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거대한 롱 샷으로 시작된다. 무수한 산자락이 광활한 평지로 이어지고 황혼의 시간마저 거의 지나 색조는 어둠에 잠겨 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저 풍경 속에 한 대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아담과 이브의 금기와 위반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일 뿐이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오프닝 이미지에서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황량함’과 그 황량한 풍경에 대한 ‘매혹’이다. 이 매혹의 주체는 끊임없이 정박을 거부하고, 그 정박의 한계를 직시하며, 황량한 풍경으로 돌진하는 유목민들,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모두 이안 감독 그 자신을 닮았다.

<아이스 스톰>은 70년대의 유목민, 즉 히피문화를 경험한 주인공들이 90년대 미국 백인 중산층이 되어 경험하는 삶의 공허에 관한 영화였다. 그들은 자신의 정박지가 어느 날 철저하게 깨져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꽁꽁 얼어붙은 거리의 전신주가 폭발하며 일으키는 불꽃과 찰랑거리는 얼음 소리는 주인공들의 심리적 내면만큼이나 싸늘하고 스산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것은 아름답다. 그것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것은 감독의 매혹이 그 장면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텅 빈 것들에 대한 매혹, 혹은 황량한 정서에 대한 매혹은 이안 감독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다. <와호장룡>에서 용의 플래시백으로 보이는 사막의 풍경 역시 텅 비어 있다. 이곳은 법도에 의해 지배되는 강호나 시장, 촌락과는 전혀 다른 공간임을 증언한다. 이곳에서 아버지의 법들은 무의미해지며, 공간적 지표 역시 기능을 상실한다. 들뢰즈 식의 표현을 빌어 철저히 ‘매끄러운 공간’인 이곳에서 용은 처음으로 탈주와 자유를 경험한다. <헐크> 역시 국가권력(군부)과 아버지의 법을 피해 주인공이 경유하는 공간은 거대한 암석들이 남근처럼 솟아 있는 모하비 사막이다. 헐크가 이 사막에서 뛰어오르는 순간, 모든 사운드는 철저히 그의 청각으로 수렴된다. 관객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단독자가 되어야만 하는 헐크의 귓속으로 공명하는 사막의 바람 소리뿐이다. <라이드 위드 데블>에서 독일계 이민자인 주인공은 남북전쟁의 광포한 살육전 속에서 모든 것을 상실한다. 전쟁이 아니라 야만적 학살에 가까운 그 풍경은 명백히 6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을 닮았으며,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고향과 아버지, 정체성 모두를 상실한 주인공이 역마차에 몸을 싣고 새로운 ‘텅 빈 공간’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그 텅 빈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 공간을 배회하는 주체들, 즉 유목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공간은 흥미롭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그들의 저서 <천 개의 고원>에서 ‘유목민’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정치적인 정의를 시도한 바 있다. 그들에게 유목민은 ‘황폐화된 공간을 두고 떠나는 이주민과 달리, 그 공간에 달라붙어서, 그 공간에서 사는 법을 창안하고, 그 공간을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와호장룡>에서 사막을 심리적 유목지로 삼았던 용의 그것처럼, <브로크백 마운틴>의 주인공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그들의 정박지로 만들고자 평생을 갈망한다. 1963년, 떠돌이처럼 보이는 잭과 에니스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흘러들어와 우연하게 마주한다. 그리고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공간에서 결코 길지 않은 한 시절을 공유함에도 그들의 평생을 좌우할 사랑에 빠진다. 금기를 거역하지 못하던 이들은 각자 헤어져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질서에 순응해서 살아가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브로크백 마운틴을 향한다.

유목민으로서의 잭과 에니스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은 물리적 유목지가 아니라, 심리적 정박의 대상이자 갈망의 공간이다. 60년대 미국사회, 그것도 남부 카우보이들에게 금기시되어 있던 동성애적 사랑과 절대적 결합의 의지는,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 공간을 자신들만이 전유할 수 있는 완벽한 유목적 정박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한다. 에니스는 유년기에 목격한 한 동성애자의 처참한 주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잭은 에니스의 주저함에 한 발 물러선다. 몇 번 안 되는 재회 속에서 잭과 에니스는 결국 그곳이 아무것도 아닌, 텅 빈 공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만남이 되고만 싸움에서 잭은 에니스에게 소리친다. “왜 우리는 이 빌어먹게 추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만 만냐야 하는 거야?” 그 현실인식은 결국 잭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잭은 자신의 유해를 브로크백 마운틴에 뿌리길 바랐지만(죽음을 통한 정박), 그것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실패에 관한 영화다.

이안의 영화를 지배하는 이미지가 ‘황량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풍경 샷의 외연적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많은 풍경 샷들은 마치 존 포드의 ‘모뉴멘트 벨리’ 샷들이 지닌 스펙터클을 재현하는 것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존 포드의 스펙터클한 공간이 ‘미국’의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한정 공간’으로서 채워지는 것에 반해, 이안은 이 공간을 철저하게 텅 빈 심리적 공간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탈영토화인 것이다. <라이드 위드 데블>에서 남북전쟁을 치르는 주인공들이 질주하던 그 유사 웨스턴의 풍경은 대의와 명분의 전쟁이 아니라 학살극의 야만이 남긴 상처들로 비워지고, <헐크>에서의 모하비 사막 역시 국가권력으로부터 탈주하는 자의 텅 빈 공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그곳은 이안 스스로가 밝혔듯이 소멸된 웨스턴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정서와, 정박하고자 하나 정박할 수 없는 유목민들의 실패한 공간으로 남는다.

그래서 이안 영화들은 언제나 황량한 이미지로 채워진다. 텅 빈 사막과, 산자락들, 격전지들. 그러나 이안 영화의 놀라운 힘은 그곳들을 비루하고 처참한 공간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영화적 주인공들(유목민들)이 정박하고자 하는 어떤 심리적 지향의 공간으로 만들어놓는다는 점이다. 할리우드에선 대만 출신의 외국인일 수밖에 없는 이안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과 더불어, 그 정박 불가능한 실패의 이미지, 황량함의 이미지에 자신의 영화적 매혹을 새겨 넣는다. 그것은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영화 자체가 포괄하는 장르와 시대와 공간의 무시간적이고 무규정적 공간의 매혹 그 자체로서 드러난다.


정지연(영화평론가)